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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병원 충청권트라우마센터, 코로나19 정신건강 인식개선 수필/수기 응모전 대상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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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2-09-26
눈물이 덜컹하고 갑작스레 쏟아진다. 나의 미래를 보는 듯하기도 하고 뭐, 하여튼 그런 공감이 있다.
칠순이 넘은 주인공의 배달 오토바이가 아직도 걱정이다. 지금은 돈벌이가 조금은 나아졌는지도 건강은 유지하고 계신지도 나이들고 혼자이면 더욱 그럴 것이 얼마나 외로울까, 외로우니 사람이다라고도 하지만 노년의 쓸쓸함이 내 감정을 불편하게 건드린다.
대한민국의 현 주소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조금은 그렇지만 그래도 달리 표현 할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튼 그의 글속에서 삶을 본다. 녹녹치 않았을 터, 나의 작은 연민의 마음을 보태고 싶다. 그와 나란히 걷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아래는 코로나19 관련 정신건강 인식개선 “마음을 심(心)는 이야기들” 대상작품인 “코로나를 이긴 아빠의 힘”(김선규님 作)의 전문이다.
모두들 힘내시고 건강하시길 바란다.
- 국립공주병원 충청권트라우마센터, 코로나19 정신건강 인식개선 수필/수기 응모전 대상 작 전문 -
코로나가 기세 좋게 확산돼가던 작년 봄, 나는 코로나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잡은 일자리였는데, 코로나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나를 비롯한 직원 세 명이 자리를 잃었다.
월급이 많은 건 아니었어도 혼자 생활을 꾸리기엔 무리가 없었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퇴사를 하던 날, 나는 마스크 속에 침울한 표정을 감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코로나 때문에 일어난 불가해한 상황이어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실직 상태에 놓이게 된 터라 특별히 나만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코로나로 경기가 잔뜩 위축된 상황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입이 없어 속만 태우던 그즈음, 혼기를 한참 지난 딸아이가 내년쯤 결혼을 하게 될 것 같다고 귀띔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더 이상 결혼을 미루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딸아이의 결혼 얘기에 별안간 마음이 급해졌다. 아버지로서 자식의 결혼식에 넉넉하게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경제 상황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딸아이에게 변변한 도움조차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더욱이 하늘나라로 떠나고 없는 아내의 빈자리도 채워줄 수 없어 실직 통보를 받았을 때보다 감정이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장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거리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코로나로 배달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배달 일에 뛰어 관련 시장이 팽창하고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문제는 배달 수단이었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오토바이가 있어야만 배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주변 지인들을 통해서 수소문해 보았더니, 오토바이 없이 자전거만 있어도, 혹은 걸어서도 배달이 가능하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는 일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던 나는 곧바로 배달 앱을 깔고, 기사 등록을 하고, 동영상 교육을 받았다. 만만의 준비를 갖춘 나는 자전거에 아이스박스를 임시로 고정시킨 후 본격적으로 배달 일을 시작했다.
처음 이주일 동안은 하루 동안 배달을 하고 번 돈이 대략 이만 원 안팎이었다. 하루 종일 배달을 하는 게 아니라, 주로 점심과 저녁식사 시간대에만 콜을 받아 배달 건수가 4~6건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처음 하는 일이기에 긴장감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서 배달을 한다고 해도 막상 음식점과 배달지를 찾아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실수 없이 배달을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런데도 한 번은 배달지를 찾지 못해 배달이 예상 시간보다 20분 가까이 지연된 일이 있었다. 음식을 전달한 나는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고객의 클레임은 음식점 업주를 거쳐 나에게 고스란히 떨어졌다. 또 한 번은 아파트 호수를 잘못 확인해 아랫집에 음식을 놓고 온 적도 있었다. 자잘한 실수를 몇 번 경험하자,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몸살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배달 일 하는 걸 알게 된 딸아이가 위험하다며 당장 그만두라고 성화를 냈다. 나는 “혼자 집에 있기가 적적해서 취미 삼아 하는 일이니 걱정 말라.”며 딸아이를 안심시켰다.
두 달여가 지나고 나니 음식점과 주문지를 찾는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호수를 정확히 확인해서 더 이상 실수 없이 배달을 할 수 있게 됐다. 배달 일에 익숙해진 만큼 받는 콜 수도 하루에 10건 이상으로 늘어났다. 차곡차곡 통장에 쌓여가는 수입은 코로나가 불러온 팬데믹의 공포와 불안감을 모두 잊게 할 정도로 든든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나는 열심히 페달을 굴렸고, 딸아이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결혼을 준비했다. ‘애 엄마가 있었더라면 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써주었을 텐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다정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는 무뚝뚝한 아버지인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결혼식을 한 달여 앞둔 올해 초봄, 나는 딸아이를 불러 그간 모아두었던 비상금 1000만원과 1년 가까이 배달 일을 해 번 돈 1000만원을 보태서 건네주었다. 한사코 마다하는 딸아이 손에 돈 봉투를 쥐어주며 “아빠가 이것 밖에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결혼해서 남편 사랑 듬뿍 받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고 다독여주었다. 딸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딸아이는 코로나 속에서 소규모로 결혼식을 치렀다. 바이러스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진행된 결혼식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딸의 얼굴이 행복해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어디선가 아내가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고생했다고 내 어깨를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딸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빠! 고맙습니다. 아빠가 코로나 와중에 힘들게 버신 돈, 소중하고 감사하게 잘 쓸게요.”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딸아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네 결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국립공주병원 충청권트라우마센터, 코로나19 인식개선 공모전 "마음을 심(心)는 이야기들" 에 응모해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